[문학] 은평치과 대표원장 이영만박사, 수필 '소록도의 천사 수녀를 그리며'한국다선문인협회 상임고문 대금 이영만 박사, 본보 공동 회장 수필 투고
[서울케이뉴스] 김예은 기자 = '소록도의 천사 수녀를 그리며' 제목의 수필은 두분의 수녀분의 소록도 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영만 박사(치협 31대 기획이사)는 수필 지문에서 "두 수녀님의 삶을 돌아보며 자문해 본다. 나는 어떤 의사인가.
나는 아픈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분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고 있는가." 라며 의사의 소명을 되돌아 본다.
은평치과 대표원장 이영만 박사의 수필을 통해 소록도의 천사인 두분의 수녀 삶을 생각해 보며, 수필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수필 전문
“상이군인 나타났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천방지축으로 동무들과 뛰놀다가 누군가 이렇게 소리치면 모두들 소스치게 놀라 흩어져 집으로 숨어들었다. 목발 짚고 절뚝거리거나 혹은 섬찟한 의수로 허공을 헤치며 구걸하러 다니는 상이군인은 공포의 존재였다. 6.25 전쟁 혹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처참한 상해를 입고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던 애국인의 사정을 당시 코흘리개들이 어찌 알았겠는가.
또 한 가지가 있다. “문둥이가 오고 있대.”
한 번도 직접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도 ‘문둥이’이라는 말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듯한 무서움을 느꼈다. 문둥이가 어린애를 잡아가서 간을 빼먹는다는 유언비어도 있어서 그 공포감은 상이군인에 비할 바 아니었다. 요즘의 시쳇말로 전염병처럼 퍼져있던 가짜뉴스의 폐해였다.
문둥병, 곧 나병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한센병에 대한 당시 사회의 무지와 가난의 결과이기도 했다. 접촉해도 쉽게 감염되지 않는 피부질환임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는 문둥이로 불리며 사람들의 천대와 따돌림을 당해야만 했다. 한 인간으로서의 인권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천형같은 불운의 존재가 바로 나환자, 한센인이었던 것이다.
‘문둥이시인’으로 불린 한하운. 그의 시 ‘전라도 길-소록도로 가는 길’에는 어둠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간 그들의 비극적인 모습이 고스란히 형상화되어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아마도 약을 구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으리라.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옥같은 삶이었으면 보리피리 불며 고향의 봄 언덕을 그리며 마침내 죽어서는 파랑새가 되리라는 꿈을 꾸었을까.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리’(‘파랑새’ 전문) 1919년에 태어나 1975년 삶을 마감한 한하운 시인의 일생이 <네이버 사전>에 요약돼 있다.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 종규(鍾奎)의 아들이다(나병환자가 되면서 개명한 것 같다).
필자는 의사로서의 생업을 시작할 무렵 어느 해인가, 보리가 패는 계절에 고흥군의 소록도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하운 시인에 대해 잘 몰랐고, 한센병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이 없었다. 시를 공부하고 쓰면서, 의사로서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넓어지면서 ‘문둥이 시인’과 한센인의 역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국립소록도병원은 일제강점기였던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소록도자혜의원으로 설립되었다. 일제는 전국의 한센인들을 강제로 소록도로 이주시키고 자혜의원에 수용한 뒤 강압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이후 1934년 10월 소록도갱생원, 1949년 5월 중앙나요양소, 1951년 9월 갱생원, 1957년 12월 소록도갱생원 등으로 병원 명칭을 변경하면서 규모를 확장해왔다. 이후 1987년 12월 31일 지금의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재 소록도는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 병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고흥군에서는 코로나19 발생 이후 4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던 소록도의 중앙공원과 한센병 박물관을 개방했다고 한다.
조만간 시간이 나는 대로 소록도를 찾아보고자 한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오롯이 ‘자원봉사의 성지’ 소록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의 아름다운 삶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1월 31일자 서울신문에는 40여년 간 한센인을 돌보다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할매 천사 수녀’가 소록도 병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오는 5월, 10여년 만에 다시 소록도를 찾는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마가렛 수녀는 지병으로 방문이 어렵다고 했다.
두 수녀는 청춘을 한센인을 위해 고스란히 바친 ‘소록도의 전설’이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의 간호학교 동기였던 이들은 갓 20살을 넘긴 1962년 2월 소록도에 왔다. 5년 계약으로 한센인 봉사에 나섰지만, 그 기간은 43년이란 긴 세월로 이어졌다.
이들이 소록도 병원에서 처음 한 일은 한센인과 함께 식사하기였다. 이 사건은 국내 의료진조차 ‘나병환자’라며 직접 치료를 꺼렸던 당시 분위기에서는 큰 충격이었다. 특히 외국인 의료진이 환자의 상처 부위를 맨손으로 직접 만지며 약을 발라 주는 치료 과정이 공개되면서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전염관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미친 짓’이라며 만류하고 손가락질했던 병원의 다른 직원들도 6개월이 지나도 이들 외국인에게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자 그때부터 한센인들을 ‘그냥 환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두 수녀는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했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 사업에도 헌신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한센인을 가족처럼 돌보며 숱한 화제를 남겼던 두 ‘할매 수녀’는 70대의 고령에 접어든 2005년 11월 소록도를 떠났다.
누구에게도 미리 알리지 않고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다. 이들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 수녀님의 삶을 돌아보며 자문해 본다. 나는 어떤 의사인가. 나는 아픈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분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고 있는가.
보리 패는 5월에는 내게 존재론적인 시적 영감을 던져주는 한하운 시인의 길을 따라 소록도에 가봐야겠다.
한편 대금 이영만 박사는 은평치과 대표원장으로 시인으로 작사가, 발명가로 1인 다역의 역할을 하며 세상의 빛과 같은 존재로 이미 지역사회 뿐만아니라 전국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대명사 같은 존재이다.
현재 (사)한국다선예술인협회 (회장 김승호)의 상임고문과 신문고뉴스, 한국다선뉴스의 회장으로 언론인으로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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